Saturday, December 12, 2015

2015.12.11. 오륜교회 금요예배

<2015.12.11. 오륜교회 금요예배>

축구선수 김신욱 선수 간증

김신욱 선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 하나님 음성 듣는 자다.
eg> "네 발걸음을 내가 기뻐한다."(고등학교때 연습 후 수요예배 참석할 때), "넌 승리했다."(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해외 일정 복귀 후) 등

부러웠다. wannabe. 그래서 궁금했다. 비결이 뭘까? 내가 찾은 건 두 가지.
(1) 매일밤 개인예배 드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만남
(2) 가는 곳마다 예배를 조직하는 것. 이건 실천의 문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본인 스스로도 새로운 곳에서 예배를 세우는 게 두렵다고 했다.

습관이 된 (1)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알게 되는 것 같고, (2)를 통해 예배에 모인 자들에게 성령이 임재한다.

Tuesday, October 20, 2015

마태복음 7:13-14,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사무실에서 제 앞에 앉아계시는 과장님이 다방면으로 독서를 하시면서 읽는 책을 제게 보여주시곤 하는데, 오늘은 유명한 자기계발서(브라이언 트레이시?)를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제가 그리스도인인줄 알기에 '긍정의 힘' 저자 조엘 오스틴을 물어보더라구요.
전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를 했어요: "기독교 신앙은 축복과 고난의 메세지가 모두 들어있는데, 그의 책에는 축복의 메세지만 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면서 고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있다고 다음 구절을 전달했어요^^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랬더니,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 마지막 부분에 사람들이 적게 간 길 간 적을 회상하면서 왜 한숨을 쉬냐고 하더라구요.

그 참에 시 한 편 감상했습니다 ㅎ

———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 생각했지요. 풀이 무성하고 발길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그 길도 걷다 보면 지나간 자취가 두 길을 거의 같도록 하겠지만요.

그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놓여 있었고
낙엽 위로는 아무런 발자국도 없었습니다. 아, 나는 한쪽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길이란 이어져 있어 계속 가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Wednesday, October 7, 2015

재물에 대한 상념_2015.10.07.

문득 든 생각인데

모으는건 쓰는 시기를 미루는 거잖아? 언젠가는 쓴다는거지. 즉 어디에 쓸지는 늘 남아있는 문제야.

내게 든 생각은 일반론으로는 '청지기적인 삶을 살아야겠다.'
구체적인 실천으로는 '나눔'의 정신을 더 살리고 싶다? 굳이 사회단체 기부가 아니더라도 가족친지에게라도^^

아, 이거네.. "내게는 청빈하고 다른이에게는 너그럽게"

Thursday, October 1, 2015

<마담 보바리> 독서감상

1. 플로베르가 '문학의 수도승'이라 불리는 이유를 서술하세요.

좋은 번역서는 역자해설이 충실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역자해설은 작가 플로베르의 문학사적 위치와『마담 보바리』의 문학사적 가치를 잘 드러낸다. 역자는 ‘스타일’을 중요시하는데, 역자에 의하면 “스타일이란 형태를 통해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p.514)”이다. “아름다운 스타일이란 리듬이 살아 있고 군더더기가 없이 정확하며 소리가 듣기 좋은 것이어야 한다.(p.516)” 그래서인지 작가는 정확한 단어를 고르고 장면을 구상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작가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구도자 같은 인내심이 그를 ‘문학의 수도승’으로 불리게 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내용에 있어서도 수도승이라 불릴만한 작가의 중심생각이 드러난다. 의사시험을 준비하는 샤를르 보바리의 모습(pp.22-23)은 시대를 초월한 문학의 보편성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착실한 수험생에서 방탕에 빠진 모습을 거쳐 다시 착실하게 공부하는 ‘착실 → 방탕 → 착실’의 순서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결국에는 착실한 삶이 목표도달의 필요조건임을 암시한다. 3부 5장 이후부터 엠마의 변화는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먼저 그의 생활은 거짓말투성이가 되고(p.392), 그녀 자신도 “정신없이 생의 쾌락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인지(p.399)” 알지 못한다. 그 와중에 사치를 위해 뢰르로부터 차용한 부채는 그 덩치가 점점 커진다. 부채와 관련하여 엠마는 지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건성으로 일을 처리해 버린다. 생의 끝자락이 벌써부터 예고된 셈이다. 이같이 내용 면에서 작가는 파멸해가는 인물을 통해 무절제한 쾌락의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반면교사를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수도승’이라 할만하다.

2. 『마담 보바리』가 사실주의를 완성하고 현대소설의 초석을 놓었다고 평가 받는 이유를 적어보세요.

문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도구를 제공하기도 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의 차이를 관찰한 듯 정리한 문장을 통해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을 이론화한다. ‘폴리애나’ 역시 문학작품으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성격을 유형화한 개념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골디락스’는 당시에 경제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스탕달 신드롬’은 예술 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아찔한 충격을 그대로 전달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보바리즘’은 어떨까? 나는 다음 문장이 보바리즘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본다: “미래의 행복은 열대 지방의 해변처럼 그 앞에 가로놓인 광대무변의 공간에 그 특유의 무기력을 향기로운 미풍인 양 쏘아보내는 것이었다.(p.141)”로돌프의 대사에서도 비슷한 심정이 느껴진다: “그들에게는 꿈과 행동이, 가장 순수한 정열과 가장 격렬한 쾌락이 번갈아가며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변덕과 광기 속으로 뛰어드는 겁니다.(p.208)”
문학이 현실을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준다는 점에서 사실주의라면 사실주의이고, 해당문학의 정신이 표현하는 것이 시대의 진부한 매너리즘을 깨뜨릴만한 이념과 감상의 표현이라면 그것이 현대적일 것이다.
아울러, 샤를르와 엠마의 첫 만남에서 표현되는 엠마의 심리묘사는 ‘사실적’으로 아름다움 그 자체다.(1부 7장 첫부분, pp.64-65)

엠마와 레옹I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지나는 장면(pp.157-158), 평행선을 그리는 엠마와 신부의 대화(pp.164-168), 작품 곳곳에 등장해서 의지(지식에의 의지, 인정과 명예에의 의지, 부에의 의지 등)를 드러내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간접적으로 작가의 비판선 상에 놓여있는 인물 오메 등 『마담 보바리』는 작품을 다각도로 감상할 수 있는 매우 흥미 있는 소설이다.

Thursday, September 3, 2015

마담 보바리 독서중 상념_2015.9.3.

(1) <마담 보바리> 첫 부분이다. 며칠 전, 무슨 책인지 묻는 분께 나는 책 제목과 함께 책의 내용에 대해서만 말씀드렸다. "한 여인의 파멸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해서는 답변을 못했다. 시골 농장생활을 하던 엠마는 수도원에서 사랑과 낭만에 대한 통속소설만 읽고 환상 속에서 사랑으로 인한 삶의 환희를 찾는다. 그런 그에게 작가들이 쓴 대자연의 서정적 밀물은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반면에, 그에게는 파란만장한 삶이 매력적이다.
(2) 2015.9.3.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 부분을 읽었다. 내릴 때 쯤 되어 객실 안을 둘러보니 밀집한 사람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 게임, 채팅, 미디어 컨텐츠 등등 - 생각이 문득 '소비'로 옮겨갔다. 요즘 내 주된 관심사이기도 하다. 쇼핑을 통한 물질의 획득, 돈을 소비함으로써 얻는 즐거움이 만연되어 있는 사회다. 나부터도 시계, pc 및 새로나온 각종 ICT기기와 내 흥미를 충족시켜줄  소비에 빠져서 허우적대기 일쑤니까 말이다. 생각은 이제 물질의 소비가 아니라 관심사를 통한 열정과 에너지 소비로 이어진다. -논리축약-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스마트폰으로 게임, 채팅, 각종 미디어를 소비하는 것보다 종이책을 읽는 게 낫겠다고.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모두에게 진리는 아니다. 모두에게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
(3) 책의 이 부분과 내 생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나중에 더 곰곰히 생각해 보겠다.